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보다 더 이상입니다
"악의 심리학" 중에서
- 킴 마이클즈 -
다시 한번, 우리가 (왜) 여전히 혈거인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마음 상태에 대해 배운 것】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제)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정한 마음 상태】가 우리에게 정체감을 주지만, 【이 정체감】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조상, 혈거인들】은 【〔(그들이 직면한) 상황〕과 〔(그들이 삶을 본) 방식〕에 근거해서】 특정한 마음 상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마음 상태】가 만들어졌을 때, 그것이 【〔폐쇄계〕, 〔닫힌 정신적인 상자〕】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이 ...에 근거한〕 지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이 (왜) 단지 【혈거인이라는 마음 상태】에 계속 갇혀 있지 않았을까요?
만약 【우리의 조상】이 【그 마음 상태에】 머물렀다면 - 【그들 자신】을 【〔혈거인으로〕 그리고 〔혈거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확고히 확인하면서 - 우리가 어떻게 그 단계를 넘어섰겠습니까? 【간단한 대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혈거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동굴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더 이상 혈거인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혈거인의 마음 상태를 초월하도록) 야기한〕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메커니즘이 무엇일까요?
나는 (일찍이) 그것을 호기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삶이 작동하는) 방법〕을 알고 이해하는 충동】. 나는 또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삶에 대해 열려 있는 경향. 우리는 (이제) 『【더 깊이 들어가서】 그리고 【〔(우리의 진전을 몰아붙인 것)이 (우리의 직관적인 능력)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능력들】이 우리가 『【〔(감각들이 감지하거나) 혹은 (지적 능력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을 "보거나" "아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직관】은 우리가 『【우리가 〔(우리의 마음 상태보다) 더 이상이고〕, 〔(삶에 대한 우리의 믿음보다) 더 이상이고〕, 〔(삶에 대한 우리의 지각보다) 훨씬 더 이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질문을 하는 것에 의해서】 【〔혈거인이 알고 있었던 것을 넘어서〕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왜) 그런 질문을 할 용기가 있었을까요? 【특정한 정신적인 상자】로부터 【여러분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상자가 ...로부터 만들어진〕 믿음】에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여러분의 사고체계의 특정한 측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고체계가 【결코 틀리지 않고】 그리고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갖도록 허용되는〉 모든 지식) 혹은 (〈있는〉 모든 지식)〕을 준다고】』 믿도록 양육되었다면, 【여러분의 사고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여러분이 (잠재적으로) 〔의식에서 매우 무서운 변화〕에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사고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고체계〕가 틀렸거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기꺼이 숙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서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에고의 안전감】을 위협하고 그리고 에고가 『여러분이 【그것이 (또한) 〔여러분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믿도록 만들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고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은 【〔: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더 이상)이다!〕라는 기본적인 깨달음으로 오기 위해】 여러분의 직관적인 능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이 【〔두려움 혹은 자만에 의해서 지배되는〕 마음의 틀】에서 【〔사랑과 호기심에 의해서 지배되는〕 마음의 틀】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그 변화를 만들까요? 【진전】은 【질문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우리의 현재 정신적인 상자를 넘어서 질문하는〕 우리의 기꺼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기 위한 토대】는 『【〔(우리의 현재 정신적인 상자)가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고려하는 기꺼이 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틀렸다고 입증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틀렸다고 입증될 때, 우리는 진전에 우리 자신을 엽니다. 우리가 기꺼이 틀렸다고 입증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현재 정신적인 감옥에〕 무기한의 머무름】에 처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믿음 중의 하나〕가 틀렸다고 입증될 때】 우리가 (정말로) 틀렸다고 입증될까요? 만약 우리가 【세상에 대한 제한된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 믿음】이 틀렸다고 입증된다면, 우리는 (즉시) 【삶에 대한 더 높은 이해에】 우리 자신을 엽니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손해일 수 있습니까? 『500년 전에, 유럽에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것』을 숙고해 보세요. 【냉혹한 현실】은 『【유럽의 인구】가 【〔농업 사회에 의해서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그 땅에서 재배될 수 있는) 자원으로〕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중세 유럽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럽】은 【인구 통계학적인 최대의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한 잠재적인 해결책】이 있습니다:
●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더 평등한 분배가 있도록】 봉건 제도의 개혁.
●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도약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조성의 유입.
● 【〔유럽에 과잉 인구〕가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대규모의 이주.
문제는 『【이 모든 세 가지 해결책】이 【〔가톨릭 교리〕와 〔(지구가 평평하다는) 세계관〕에 의해서】 심하게 영향을 받은 중세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의해서 방해받았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사고체계】가 『【〔봉건 제도〕를 유지시켰고】 그리고 【또한 〔혁신〕을 막았습니다】』. 【평평한 지구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이 【유럽의 국경을 넘어서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불가피한 결과】는 【〔그 제도에 의해서 살아가게 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제도를 개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은 【〔일부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옛적의 인구 축소하는 것(: 질병, 기근과 전쟁)】과 발을 맞추어. 『【〔마법〕이 깨지고】 그리고 【〔오래된 세계관〕이 의문이 제기될 때까지】』 【〔전염병〕, 〔기아〕와 〔계속되는 전쟁〕】이 지속 가능한 수준에 인구를 유지시켰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봉건 사회)에서 (민주주의)로〕,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과잉 인구의 많은 부분을 흡수한〉 새로운 땅의 발견)으로〕】 비교적 빠른 이행』을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실제로) 『【오래된 사고체계가 〔의문이 제기되고〕 그리고 〔틀렸다고 입증되었다는〕】 사실에서』 손해 보았을까요? 예, 【〔봉건 제도에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손해 보았습니다. 【〔(왕), (봉건 영주) 그리고 (결코 틀리지 않는 가톨릭 성직자)인〕 확실히 자리를 잡은 파워엘리트】가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손해 보았을까요, 인류가 손해 보았을까요? 내 생각에는, 이것은 【손실】이 아니라 【집단적인 정신 이상에서 깨어나는 것을 향한 중대한 걸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