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심리학" 중에서
- 킴 마이클즈 -
【붓다의 삶에 관해 정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이야기】. 붓다는 황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첫 몇 년 동안, 【그의 아버지】가 【〔어린 왕자〕가 〔(부정적이거나 추한 어떠한 것)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궁전의 내부】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왕자】는 【젊고 건강한 사람들만】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삶이 아름답고 편안할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삶에 대한 왕자의 지각〕을 통제하려고】』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성년 초기에, 왕자가 【〔궁전 바깥을 산책했고〕 그리고 〔노쇠한 노인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쇠퇴와 죽음의 징후를 보자마자, 【왕자의 정신적인 상자】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삶에 대한 그의 지각〕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궁전을 두고 가서】 그리고 【〔그가 (보통 〈새들이 그의 수염에 둥지를 틀 정도로〉 명상을 하면서 오랫동안 앉아 있는) (금욕적인 수도자의 소박한 삶을 살면서) 6년을 보낸〕 숲으로 물러났습니다】』.
이로부터 6년 후, 【청년】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눈 깜짝할 새) 그는 『【금욕적인 형태의 삶】이 그에게 【〔그가 구하고 있는〕 내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내적인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그가 "중도"라고 불렀던)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깨달음의 결과로써, 【청년】은 『【붓다임을 깨닫고】 그리고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더 높은 의식 상태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세상으로 나가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깨달았던 것)을 가르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온 후, 그는 (처음으로) 【한 무리의 소작농】과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붓다에게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보통의 질문을 하는 대신에, 그들은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그것에 대해) 붓다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깨어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주류 불교에서 말해지는〕 방식】이 【붓다의 원래 목적과 의도】에 해를 끼친다고』 믿습니다. 【이야기】는 붓다를 『【〔예수의 출생의 이야기〕가 그를 묘사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 혹은 붓다)가 했던 것〕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머지 우리와 매우 다른〕 존재로】. 【붓다의 이야기에 대해 다른 관점】을 주겠습니다.
【붓다의 아버지】는 【에고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지 않은 상태에】 있는 동안, 【에고】가 【우리의 세상의 왕】입니다. 【〔어린 왕자가 성장한〕 궁전】은 【에고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신적인 상자의 상징】입니다. 에고는 【우리가 정신적인 상자를 떠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에고는 【삶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통제하려고】 추구합니다. 에고는 우리가 {『우리가 【〔정신적인 상자의 가치〕 혹은 〔(그것이〈정신적인 상자〉 ... 을 기반으로 한) 지각〕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야기할 수도 있는』 어떠한 것을 발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붓다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열려 있는〕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젊은 붓다와 같은 단계】를 거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풍족한〕 그리고 〔우리가 (쇠퇴, 가난과 죽음을 보는 것)에서 보호받는〕 궁전과 비슷한】 현대 세계』에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어느 시점에, 우리는 【〔이 궁전 안에 삶〕이 (그야말로)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삶에 더 이상】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궁전을 떠나기로 - 적어도 정신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궁전을 짓는데 사용되는 것들과 매우 다른〕 가르침과 개념】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중의 일부】는 심지어 【〔궁전이 ... 을 기반으로 한〕 삶의 기본적인 지각】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붓다에 의해서(- 그리고 또한 〈만약 여러분이 행간을 읽는다면〉 예수에 의해서) 경험된 과정과 같은 내적인 과정】을 따랐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이 ...에 갇혀 있는〕 정신적인 상자】에서 이미 충분히 깨어났는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충분히 깨어나지 못했다면, 나는 『여러분이 【〔내가 (지각과 정신적인 상태에 관해) 이전의 장들에서 말한 것〕을 숙고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적인 진전을 할 수도 있다고』 제안합니다. 여러분은 【붓다와 같은 깨달음으로 오는 것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은 진전을 할 것입니다, 즉 【현실】이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인 견해】를 넘어서 있다는 것.
『【붓다의 원래 개념】이 (일반적으로) 【"중도"】로 번역되었다는 것』이 다소 유감스럽습니다. 지적인, 선형적인 마음에게, 그것은 【〔중도〕가 〔두 극단 사이에 중간 지점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붓다】를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맨 처음에) 〔한 극단에서(즉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 성장했다는 것】을 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것의 오류를 보고〕 그리고 〔정반대에 들어갔습니다〕】, 즉 『【〔모든 물질적인 편안함을 부정하고〕, 심지어 〔몸을 부정하는〕】 금욕적인 생활 방식』. (그런 다음) 그는 『【깨어나서】 그리고 【(이제) 〔(두 극단 사이에 중간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 - 즉 삶에 대한 더 균형 잡힌 접근법〕을 옹호했습니다】』. 나는 【〔붓다의 방식〕이 〔삶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법〕이라고】 동의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균형】은 【〔두 극단 사이에 중간 지점을 찾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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